
어디라도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에 다짐을 남겨야 실천하게 되는 것 같아서..
요새 박사논문 리터러쳐 리뷰를 하면서 문헌을 좀 넓게 읽고 있다. 예전에는 논문만 후다닥 읽고 메모 남겼는데 요새는 좀..우울과 정치적 패배..등등에 관한 여러 쪽글들과 단행본들을 읽고 있고 이건 내게 꽤 낯설고 어려운 텍스트들이라 그냥 메모만 남기고 지나치기가 아깝다..
그래서 읽은 글들에 대해 기록을 좀 남겨둘까 한다. 딱히 정연한 정리같은건 아니고 아마 발췌독한 부분에 대한 짧은 정리와 생각정도..
일단 원제는 Left-wing Melancholia인데 한국어 번역본 제목은 개념마다 따옴표가 붙어있어서(개념어에 따옴표 붙이는거 싫어함ㅠ) 이유가 궁금했는데 역사 서문에 직간접적으로 설명이 써 있었다. 먼저 좌파를 ‘좌파’로 표기한 이유는 좌파에 대한 트라베르소의 정의가 다음과 같은 것과 관련이 있다.
우리가 말하는 ‘좌파’는 단지 정치(학)의 관습적 관점에 따른 위상학적(정치적, 제도적 공간 왼쪽에 위치한 당파) 측면에서만 규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존재론적 측면에서 규정된다. 즉 평등원리를 중심의제로 삼아 세계를 변혁하기 위해 투쟁하는 운동으로 말이다.
14
트라베르소는 논의의 전반을 좌파에 대한 존재론적 정의에 기대고 있으며, 따라서 한국에서 좌파’세력’으로 명명되는 것과 이 책이 언급하는 좌파가 다소간 차이가 있다는 것이 역자의 설명이다. 한편 우울을 ‘우울’로 표기한 것 역시, 일상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사용되는 우울은 이상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병리(학)적 우울증(depression)이기에 이 책의 원제가 인용한 뒤러 및 벤야민 맥락의 우울(melancholia)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서론 <유토피아 없이 과거를 떠올리기>를 통해 트라베르소는 “21세기는 유토피아의 전반적 몰락에 의해 형태가 정해진 시대로 태어났”(51)다고 진단한다. 20세기의 투쟁들(1917년의 뻬쩨르스부르크, 1936년의 바르셀로나, 1968년의 파리와 프라하, 1979년의 마나과 등)이 “희망의 원리”(52)를 설정했다면, 전체주의와 기후위기 등 유토피아적 전망이 붕괴되기 시작한 20세기 후반부터 희망의 원리는 “책임의 원리”(52)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SF부터 생태학연구에 이르는 다양한 형태를 취하며 환경의 파국으로 이루어진 미래의 악몽이라는 디스토피아가 해방된 인류라는 꿈 – 전제주의시대의 위험한 꿈 – 을 대체했으며, 사회적 상상력을 현재라는 좁은 경계 내로 제한했다. 다른 한편 집단적 해방이라는 구체적 유토피아는 상품의 고갈될 수 없는 소비를 위한 개별화된 충동으로 바뀌었다. … 이처럼 유토피아는 물화된 세계 속으로 사사화되는 것에 의해 파괴되고 있다.
53-54
이와 같은 언급은 유토피아가 온전히 과거의 것이 되어 사회의 현재에 속하지 않게 되었음을, 즉 “희석되고 확장된 현재가 과거와 현재 모두를 자기 안에 흡수해 해소”(54)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오직 현재뿐”(54)인 시간성 속에서 과거는 회복 불가능한 것이 되며 유토피아적 미래는 전혀 예견될 수 없다. 이러한 세계는 변증법이 마비된 결과로 나타난 것으로, 자본주의를 파괴하려는 시도는 부정의 부정(자본주의의 사회주의적 극복) 대신 오히려 자본주의의 강화와 확대를 마주했다. 21세기에 다다라 이는 노동자운동으로 대표되는 전통적 좌파 정치의 약화와 문화 상실로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을 저자는 정신분석의 설명을 경유하여 “유령 형태를 띠고 있”(73)다고 설명한다.
정신분석의 설명에 따르면 유령은 사후적 존재를 가지며, 세상 사람들 말로는 다 끝난, 소진된, 기록보관소에 보관된 경험에 대한 우리의 회고를 사로잡는다.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과거로부터 돌아온 형상으로, 우리의 육체적 삶과 분리된 에테르 같은 유령(revenant)으로 머문다.
73
트라베르소는 20세기 혁명의 실패와 그것에 대한 21세기의 기억(애도조차 완전히 허락되지 않는)을 아감벤의 “미숙한 유령”(73)에 빗댄다. 미숙한 유령은 “양심의 가책을 통해 그것을 낳은 사람을 끈질기게 찾”(73)는데, 폭력과 인종대학살의 희생자는 정당한 애도의 대상으로서 공적 기억의 무대를 차지하고 있지만 실패한 혁명의 기억은 훼손된 유토피아에 대한 희화화된 형태로 남아 좌파에게 돌아오고 있다(패배한 좌파에 대한 묘사에 공감을 하면서도, 좌파 혁명과, 폭력 및 인종대학살을 비슷한 선상에 놓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은지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저자는 이와 같은 “좌파적 우울은 사회주의 이념이나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포기”(74)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강조한다. 트라베르소에 따르면 좌파적 우울은 혁명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고 은폐되고 망각되었으며 구원될 필요가 있는 시대에 그것을 재사유하는 것”(75)이며, 애도하지 못해 온 것을 애도하는 것이 아니라 비혁명 시대에 혁명을 재사유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는 일종의 유용한 우울로서 “상실의 변형적 효과”(Butler, 2018: 48)를 함축하는데, 행동을 마비시키는 대신(이 지점에서 depression과 melancholia의 간극이 드러난다고 생각했다) 자기성찰적이며 의식적 방법으로 행동을 촉진한다. 저자는 그 대표적인 예시로 에이즈(와 관련된 위협, 낙인, 적대적 환경, 죄책감 등)에 대한 게이활동가들의 반응을 언급한다.
이 죽음충동에 반발한 게이행동주의는 슬픔과 애도와 분리 불가능했다. 우울을 회피하기보다는 그것의 흐름을 유용한 재건작업 쪽으로 돌렸으며, 의학센터를 설립하고, 심리학적 돌봄을 마련해주고, 회근에 획득한 권리를 옹호하고, 연대의 망을 재건했다. … 물론 전투성이 필요하다. 하지만 애도 또한 필요하다. 애도와 전투성 모두가 말이다.
76
이후의 장들은 보다 직접적으로 좌파적 우울의 개념과 그것의 재현들을 보여준다. 1장에서 트라베르소는 좌파의 감춰진 차원으로 항상 존재해 왔던 우울을 언급한다. 우울에 대한 규정은 많지만, 애도와 체념은 대부분의 우울에서 공통적인 특징이다. 우울-죽음-애도 간의 연관성은 서양 회화사의 주요한 주제로 다뤄져 왔으며, 이는 혁명의 시대에는 혁명적 애도의 아이콘적 이미지로 변형되기도 했다(111). 한편으로 우울은(특히 오늘날에 들어) 공허감의 형태로 표현되는데, 이는 프로이트적인 병리적 우울과 연결된다(프로이트에 따르면 애도와 우울은 유사하나 구분되는데, 전자는 상실 이후의 이행 상태이며 후자는 지속 가능한 성향이다).
이러한 서양 철학의 논의를 이어받아, 저자는 “애도와 우울 모두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로부터 유래”(118)하지만 애도는 상실의 경험을 극복하고 대상으로부터 자기를 분리하는 과정(균형의 회복)인 반면, 우울은 대상과 동일시된 채 남아 고통을 외부세계로부터 잘라내는 내성적 고립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좌파적 우울은 “불가능한 애도의 결과”이다.
공산주의는, 유토피아의 종언이 새로운 사랑의 대상을 향한 리비도적 전이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사랑하는 이상으로부터의 분리를 방해하는 시대의 완성된 경험일 뿐만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이기도 하다. … 유토피아의 종언 때문에 성공적 애도는 또한 적과의 동일시를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잃어버린 사회주의가 기왕의 자본주의로 대체되는 것이 그것이다.
119
이 지점에서 저자는 프로이트적 모델을 버리고 우울을 탈병리화할 것을 제시한다. 우울을 병리적 상태로 간주하지 않을 경우, 사랑하’던’ 대상과의 동일시, 그리고 상실 경험 극복을 거부하는 상태는 “애도 과정의 필연적 전제로, 애도를 마비시키는 대신 애도에 선행하며, 그것을 허용하며, 그리하여 주체가 다시 적극적으로 되는 것을 돕는 단계”(120)가 된다.
한편 비슷한 맥락에서 벤야민의 논의를 참고할 수 있다. 저자는 벤야민이 우울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어떤 정치적 내용도 결여하고 비판적 잠재성을 박탈당한 기분으로서의 우울”(124-125)만을 거부했음을 언급한다. 벤야민에게 있어 우울은 숙명론적 우울(수동성과 냉소주의로 특징지어지는)과 인식론적 태도로 이뤄진 우울로 나뉘는데, 후자는 폐허와 같은 세계를 감정이입적, 애도적으로 탐구할 정치적 가능성을 연다.
정치화하는, 까다로운 우울의 상으로, 그것에서 과거의 것에 집착하는 것은 현재 세계에서의 관심과 행동을 가능하게 해주며, 실로 그러한 관심을 위한 매커니즘 자체이다.
125
그러나 이러한 우울과 애도가 반드시 이념과 체제를 그 내용으로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지젝에 따르자면 우울은 상실보다는 ‘결여’와의 동일시이므로, 잃어버린 대상은 “특정한 체제나 이념보다는 오히려 부서지기 쉽고, 위태위태하며, 잠깐 동안만 지속됨에도 불구하고 회고와 주목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역사적 경험으로서의 해방투쟁”(131)일 수 있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