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13. 강릉

환란의 며칠을 보내고..집에 누워있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모 님의 권유로 강릉에 와서 쓰는 일기

지난 며칠 간 글을 읽을 수도 쓸 수도 없었다. 논문 하나를 다 썼는데, 한 주간 초록 하나를 못써서 투고를 못했다. 목요일에는 상담을 받았다. 금요일에는 몸에서 피가 났고 토요일에는 종일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토요일 오후에는 만나기 두려워하던 사람을 우연히 만났다. 모두가 떠나고 여느 때와 같은 상황이 시작되려 했고 이번에는 부러 더 단호하게 굴었다. 과거의 일들이 지금을 잠식하는게 너무 끔찍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람의 현재에도 내가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이 보고 있는 나는 아주 예전의 나이고 지금의 나는 그 때만큼 바보가 아니다..

서울역에서 2시쯤 기차를 타고 강릉으로 오는 동안 어제의 일을 반추하는데, 자꾸만 원망스러웠다. 뭐가 서러웠는지는 모르겠다..남들에겐 별일 아닐 것에 이렇게까지 휘둘리는게 싫다. 휘둘리고 있음을 주변인들에게 티내는 스스로도 싫다. 근데 그냥 이 모든 생각을 하게 만드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타인들이 싫다..남이 통제가 안된다고 싫다니 웃긴 말이라고 생각한다. 어제 저녁부로 뭔가 해결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여전히 회복은 필요한 것 같아서 강릉에 왔다.

올 때마다 강릉은 큰 도시라고 느낀다. 가장 마지막 방문은 세령이랑 강릉영화제 보러 온 2019년이었던 것 같은데, 멀티플렉스도 많고 독립영화관도 있고 독립서점도 많고 카페도 많고 사람도 많고 여전히 다니기 좋았다. 숙소 가는 길에 보이는 구제샵이랑 서점들을 돌았다.

이 땐 세은이 지금은 세령이..필카를 들고 다니던 (열정적인) 시절

역에서 버스로 10분 정도 가면 강릉제일고 근처로 갈 수 있는데, 서점과 빈티지샵과 소품샵과 카페 등등이 모여있다. 소품샵은 사실 그닥 좋아하지 않아서 슥 보고 나오고 ‘한낮의 바다’라는 서점이 있어 들어갔는데 좋은 책이 많았다. 하지만 안읽은 문학책을 사는 건 여전히 걱정스러워서 읽어본 책 중 사고 싶은 책을 샀다(아니에르노 세월 삼..ㅎ..ㅎㅎ).

왼쪽은 그냥 예쁜 문 오른쪽은 한낮의바다

짐을 들고 이리저리 다니다가 가게 외부에 비건 메뉴가 있다고 써있는 멕시칸 식당에 들어갔다. 조용하고 나오는 음악도 좋아서 책읽으면서 비건타코를 먹었다. 요새 음식이 잘 안들어가서 소프트타코 두 조각을 먹는 데 한시간쯤 걸렸다. 진짜 맛있었는데 뭔가를 먹기가 싫어서 타코 하나를 열두조각 내서 먹었다. 그래도 다 먹었다는 점에서 나쁜 손님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초코케이크를 한 조각 주셨는데 정말 맛있었다. 내일도 먹고 싶을 정도로..케이크를 먹을 때 사카모토 류이치 노래가 나왔다. 괴물 OST여서 작년 겨울의 소연이가 생각났다. 삼키는 걸 대체로 싫어하지만 가끔 삼키고 싶은 것들이 생기는데 소연이는 드물게 그렇다. 정말 박소연을 와구 먹겠다는게 아니고..소연이와의 대화나 소연이의 생각이나 그런 것들은 내게 이질감을 주지 않고 들어와도 잘 소화가 되는데 그건 오래 드러낼 수 없었던 지저분한 것들을 어느 순간 소연이에게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부피감을 줄이지 않아도 되는 관계는 얼마나 고마운지..

삼키고픈 마음을 참아서 부피감을 줄이는 것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어릴 땐 이게 그저 내 몸에만 국한되는 건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그냥 내 존재를 사그라들게 하고픈 마음이라는 걸 깨달았다. 내 글이 남는 게 무섭고, 내 모습이 누군가의 기억에 남는 게 무섭고..여하간 나의 행동반경이 넓어지면서 흔적이 많이 남는 게 무섭다. 누군가(혹은 무언가)의 한 구석에 마르고 못생기고 뚝딱거리고 모난 사람이 기입되는 것이 두렵고 그래서 애초에 많은 기억을 남기지 않으려 하거나, 내가 더 이상 필요 없어진 자리에서 최대한 나를 빨리 지우려 한다. 그럴 땐 정말 마음이 아프지만 이젠 익숙해서 빨리 직면하고 끝내버린다. 이런 지리멸렬한 마음이 생기지 않는 관계란 정말 귀한 것이다 그건 나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어제 만난 사람의 기억에서는 나를 완전히 삭제하고 싶었고 어제 만난 다른 사람의 기억에는 내가 적히면 좋겠다고 드물게 생각했다. 어느 쪽이든 그건 내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거다.

무슨…문화유산 미디어 전시?를 하고있었다

밥을 먹은 후에는 슬렁슬렁 걸어서 강릉관광호텔에 왔다. 이름에 ‘관광’이 들어가는 숙박업소에 왠지 신뢰를 가지고 있다. 지역 관광업이 시작되는 초기에 만들어졌을 것 같고, 그러면 아마 대체로 오래 유지됐을테니 적당히 만족감을 주는 곳이려니 해서..방이 넓고 책을 읽을 수 있는 테이블이 있어 좋았다. 책을 읽으며 뒹굴거리다가 독립예술극장 신영에 갔다. 강릉관광호텔을 예약한 가장 큰 이유는 신영극장이 가까워서이고, 근처를 돌아다니다 보니 19년 20년 두 해 간의 강릉영화제 상영관들이 보여 아쉬웠다. 오늘은 <해야할 일>을 봤고.. 내일은 아마 <할머니가 죽기 전~..>, <룩백>, <줄리엣, 네이키드> 세 편을 볼 것 같다. 해야할 일 좋은 영화더라..중요한 기록이라고도 생각했다. 너무 사실적이라고 생각해서 기획 과정이 좀 궁금했다. 요새 불안이 커서 자꾸 무엇이 인물들에게 불안을 가져오는지만 보였다 영화의 초점이 전혀 그게 아니었는데..제작자에게 죄송해지는 독해..밖에 있을 땐 생각이 많았는데 들어오니 그냥 졸려서 잠이나 자고 싶다. 쉬러 온 거니 자야겠다. 자고 일어나면 마음과 방이 밝아져 있을 거라는 문장을 오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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