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새로운 노동세계>

집중이 안돼서 미끌미끌한 이론을 읽었다..

사실 장애노동에 대한 이론적 기반을 좀 더 깊이 있게 구성할 수 있을까 싶어 읽은 글이었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사업을 시민노동으로 읽어낸 연구들이 몇몇 있었다. 20세기 내내 장애인의 정치경제적 통합이 주로 ‘정상노동’에의 참여, 그러니까 규범적인 노동으로 비규범적인 몸과 정신을 회귀시키는 방식으로 논의되어 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처럼 노동의 범주 자체를 넓혀 장애노동을 논하는 시도가 매우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앙리자크스티케가 지적했듯, 고유한 손상을 가진 주체들을 사회경제적으로 똑같은 위치에 놓으려는 동일성의 논리가 여전히 장애노동 논의(특히 경제학적 논의들..)를 지배하고 있고, 장애노동자를 예비 산업군으로 간주하려는 프레임이 유효하게 작동한다. 다만 지금까지의 논의들이 거의 경제학적 측면에서는 ‘보호고용’으로 칭하는 노동을 대상으로 했다는 데에 다소간의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 이 영역이 “국가의 인준 아래”에서 이뤄지는 자발적 노동이라는 점에서 시민노동 개념과 긴밀히 붙는다는 점은 더이상 논할 바 없지만, 경쟁고용 영역에서 장애노동자의 노동을 ‘정당한’ 것으로 만드는 데에 이 개념을 적용할 수는 없을까? 그러니까 나는 이론을 볼 때 지나치게 현실적이라서..시민노동이라는 것이 사회 보편으로 확장되는 것을 물론 당연히 지향하지만, 동시에 취업노동이 지배하는 노동사회에서 시민노동을 일종의 통약 가능한 언어로 사용할 가능성을 묻고 싶은거다..꾸준히 ‘일자리’에서 중요한 것은 ‘일’이 아니라 ‘자리’라고 주장해 왔는데 이게 꼭 ‘장애인을 위한 일자리’로 명명된 곳에서만 유효하지는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사실 한국 비장애노동의 많은 부분도 ‘자리’ 확보로서의 노동으로 이뤄진다. 연공제가 대표적이라고 느끼는데, 생산성과 어느 정도 무관한 급여의 지급이 한국 사회에서는 꽤나 쉬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정말 조악한 주장이지만, 생산성과 무관한 고용과 급여지급이 일종의 정치적 사회의 기입으로서 작동할 수 있다면, 그러니까 이미 존재하거나 만들어질 수 있는 ‘임금노동’의 ‘자리’가 시민노동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인식되거나 시민노동적 특성을 일부러 불어넣는다면, 지금 ‘생산적’이지 않다고 여겨지는 노동들도 노동으로 인정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벡이 취업노동과 시민노동의 대체 불가능성을 얘기했지만, 부분적으로는 반대한다. 둘은 분명 다른 개념이지만, 임금노동이 시민노동으로 전환되거나 인식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래는 그냥 기억에 남는 말들..


노동은 거의 대안이 없을 정도로 현대사회의 핵심이 되었다. 이와 같은 노동의 가치절상은 시민 계층이 마련한 이중의 발명물 – 유급 노동은 빈곤을 퇴침함과 동시에 인간들을 사회 질서 안에 묶는 결정적인 도구로 작동한다 – 이었다(이반 일리히). 이 흐름 속에서 유급 노동은 인간이 자신을 이해하는 인간학적 기준이 되었는데, 즉 인간의 정체성과 인격은 궁극적으로 오직 노동 속에서 훈련되고 자연화된다. 취업노동은 사적인 생존만이 아니라 정치적 생존의 근거가 되어 왔으며, 생동적인 취업노동 참여를 생동적인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으로 삼는 노동민주주의가 등장했다.

하지만 급격한 생산성의 향상 속에서 노동사회가 도달한 한계를 어떻게 해석하고 해소할 수 있는가? 노동의 미래와 관련된 이 질문은 ‘완전고용사회가 복귀하는 것인지 아니면 소멸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치환될 수 있다. 노동의 미래에 대해 제시되는 아래의 주요 시나리오들은 개혁적이지만 동시에 노동사회의 틀에 여전히 갇혀있다는 한계를 갖는다.

희망쇠망
지식기반정보기술1. 노동사회에서 지식사회로2. 노동 없는 자본주의
지구화3. 세계시장-신자유주의적인 노동의 기적4. 지방 차원의 노동 결박-지구화에 따르는 위험감수
생태위기5. 영속적인 노동행위-생태적인 경제 기적6. 지구적 아파테이트
개인화7. 자영기업자-불안정성의 자유8. 노동의 개인화-사회의와해

9. 노동사회와의 결별: 다채로운 활동성의 사회

10. 무위의 저주: 여가사회

11. 탈국가적임과 동시에 정치적인 시민사회: 유럽적 사회모델

지구적 세계시민사회와 지방적 세계시민사회로의 진입이 가능하다면, 취업사회와의 결별이 지니는 위험성은 감소할 것이다. 완전고용이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으며, 임금노동은 인생의 중점이 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임금노동의 자리에 세계시민적 의도에서의 정치적 사회가 들어선다면, 민주주의를 임금노동화시키지 않고 민주주의를 민주화할 수 있는 정치적 사회로 진입할 수 있다.

그러면 임금노동의 자리에 어떻게 세계시민적인 정치적 사회를 기입할 수 있을까? 이는 시민계급적 참여 활동 이상의 것으로서의 ‘시민노동’을 통해 현실화될 수 있다. 시민참여는 무대가성을 근거로 지위를 인정받는 것이라면, 시민노동은 시민수당을 통해 비록 정식 급료는 아니지만 일정 보상은 받음으로써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이 때 시민수당은 적어도 실업보조금과 사회부조의 온당한 수준은 상회해야 한다. 또한 시민노동이 제대로 이뤄지려면 빈곤과 미래에 대한 걱정에서 벗어나 있어야 하며, (경제적) 성장에 대한 지향이 없어야 한다. 요컨대 시민노동은 “국가의 인준 아래 시장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는 것”(221)이다. 시민수당 수령자는 공적으로 중요하고 효과적인 시민노동을 수행하며, 그렇기에 실업자가 아니고 성과에 대해 시민수당을 지급받는다. 이는 공적 이전금, 기업의 사회적 후원금, 자치단체의 재원, 시민노동 자체의 경제적 수익으로 충당된다. 수당의 수령자에게는 취업노동 이외에도 만족을 창출하며, 사회적으로는 시민노동으로 생산되는 경제적 가치 이외에도 일상적 민주주의의 활성화와 같은 사회적인 능동성과 정체성의 대안적 원천을 마련한다. 또한 시민노동은 참여와 조직 형태의 자율성과 자발성을 특징으로 하며, 공적으로 보호되고 높이 평가받는 자립성을 그 조건으로 한다.

그렇기에 동시에 시민노동은 몇몇 딜레마를 마주한다. 사회적 자발성과 책임성이 어떻게 국가의 인준 아래에서, 즉 법적인 규정 아래에서 어떻게 실현 가능한가? 이는 시민노동이 제도적인 것에 복속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뜻한다. 근데 그렇다면 누가 이 자발성을 조직할 것인지의 문제가 남는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가적 요소가 공공복리를 위한 노동과 결합되어야 하고, 또 결합될 수 있다는 것이 시민노동 모델의 핵심적 발상이다. 이러한 설명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 시민노동은 정식 급료를 받지는 않지만 자질 확보, 연금 요규 및 사회 시간의 인정, 선호물 신용장(favor credits) 등을 통해 물질적으로나 비물질적으로 보상을 받는 일이다.
  • 시민수당은 시민노동의 자율성을 물질적으로 보장하는 것이다. 그 최저액은 실업수당, 실업보조수당, 사회부조금의 척도를 근거로 산출된다. 시민수당은 자치단체의 대원 수단과 시민노동 자체의 수익에서 나오는 수단에서 적립된다.
  • 그렇지만 여타 전제들이 같음에도 불구하고 시민수당 취득자는 사회부조금이나 실업보조금의 수령자가 아니다. 그들은 자발적인 주도성을 갖고 공동체에 유용한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경우 노동시장의 처분에 맡겨지지 않는다. 그들은 결코 실업자가 아니다.

시민노동은 취업노동의 대체물이 될 수 없지만, 취업노동시장에서 소외된 이들이 노동시장으로 도약해 들어가는 것을 도울 수 있으며 따라서 취업노동과 시민노동을 법적 차원에서 소통하게 만들어 두 영역 간의 교체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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