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스로 되돌아가다>

에세이에 가까운 글이라 간략한 내용 설명과 인용구 정도로 정리합니다.

1부.

디디에 에리봉은 이 저서를 통해 자신을 가족적 과거로 데려감으로써 자신을 사회적 과거에 정박시키고자 한다. 과거는 “근본적으로는 개인적인 관계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를 집합적인 역사와 지정학 안에 위치시키는 지형도”(p.22)로서, 스스로를 재정립할 수 있게 한다. 자신의 삶을 구성해 온 뒤얽힌 두 여정 – 성적 질서에 관한 궤적, 사회적 질서에 관한 궤적 – 중 전자를 택하고 후자를 배제하면서 그의 정체성을 구성했지만, 저서를 통해서는 두 여정 모두를 다루며 스스로를 재발명하고자 함을 밝힌다.

과거를 일종의 ‘사회적 과거’로 인식하고 분석하는 데에는 특정한 태도가 필요하다.

에리봉은 “사람들이 자생적으로 스스로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과 인식론적으로 단절해야만 체계 전체를 재구성하면서 사회질서가 재생산되는 메커니즘을 기술할 수 있다”(p.56)고 봤다. 이러한 태도는 사회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과 정치적 관점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미처 의식하기도 전에 판결은 이미 내려져 있다. 태어나는 순간 선고문이 우리 어깨에 낙인처럼 새겨지고, 우리가 차지할 자리도 우리에 앞선 것들, 그러니까 우리가 속한 계층과 가족의 과거에 의해 규정되고 제한된다.

p.57

이러한 관점 속에서 에리봉은 랭스의 노동자인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과 정치적 태도를 조망하고, “스스로를 발명하기 위해서는”(p.66) 자신을 이러한 태생적 배경과 분리해야 했다고 말한다.

2부.

사회질서는 모든 사람에게 지배력을 발휘한다. 모든 것이 잘 ‘규정되어 있고’, ‘의미’와 ‘기준’으로 충만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우리 의식 깊은 곳에 새겨진 규범에 대한 애착에 기댈 수 있다. 그러한 애착은 어린 시절부터 사회세계에 대한 지속적인 경험을 통해서, 그리고 성장 환경이 법적, 정치적 규칙에 어긋날 때 느끼게 되는 불편함 – 수치심 – 을 통해서 형성된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문화는 그러한 규칙을 유일하게 살 만한 현실이자 도달해야 할 이상으로 표상한다. 이러한 가족적 규범이 실제의 삶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p.78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낳고, 어머니를 떠나 여러 남성들과 가정을 꾸렸던 외할머니의 삶을 숨기려 했던 과거를 언급하면서 에리봉은 사회질서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설명한다. 에리봉의 이러한 관점은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유동성 또는 상대성을 보여주며, 정상으로 간주되는 규범이 항상 부분적인 현실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습득한 지식과 실제 노동 계급의 삶을 비교 대조하면서 이론과 현실의 괴리를 성찰해낸다. 그에 따르면 자신이 “신봉했던 마르크스주의는 노동 계급을 이상화하고 신화적 실체로 변환시키는 하나의 방식”(p.97)이었다. 소비주의적인 가족의 모습은 에리봉이 배워 온 노동운동의 거대서사에 조응하지 않았다. 에리봉은 이러한 괴리 앞에서 변화해야 하는 쪽은 현실이 아닌 ‘서사’임을 강조한다.

어떤 정치적 서사가 그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실제로 누구인지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서사가 화제로 삼고 해석하는 개인들의 삶을 구축된 허구로부터 빠져나간다는 이유로 비난하기에 이른다면,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통일성과 단순성을 해체하고 거기에 모순과 복잡성을 부여하기 위해 변화해야만 하는 쪽은 서사이다.

p.98

에리봉은 자신이 이전에 습득했던 신화화된 노동운동 서사는 일종의 ‘탈동일시’의 기제였다고 말한다. 정치적으로 구성된 허구는 스스로가 보고 자란 노동자의 실제 삶에 대해 내리는 판단과 그곳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욕망을 은폐하는 기능을 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리봉은 자신이 노동자 계급에 대한 일종의 소속감을 느꼈음을 밝힌다(하지만 동시에 이것이 자신이 속한 계급 전체가 하나의 계급으로서의 자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어떤 계급 전체가 계급으로서, 또는 명확히 규정된 ‘집단’으로서 자의식을 갖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그러한 계급에 대한 소속감을 느낄 수 있다”(p.114)).

동시에 에리봉은 교도소 수감 비율과 같은 통계적 자료는 노동 계급을 사회가 어떻게 다루는지를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도시의 빈민 구역 등의 상황은 “사람들이 특정한 범주의 인구 집단을 어떻게 대하는지, 그들을 어떻게 사회적, 정치적 삶의 주변부로 밀어내고 어떻게 가난과 불안정성과 부재하는 미래로 내몰았는지”(p.136)를 보여준다. 이 해석이 음모론적이라는 비판을 마주할 수 있겠지만, 사실 비판론자들 역시도 ‘음모론적’ 배경을 은연중에 인정하고 있다. 예컨대 부르디외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를 비판하지만 그 역시도 교육 체계 등의 ‘진짜 기능’을 찾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가 비판하는 음모론적 관점에 아이러니하게 다가선다.

3부.

에리봉의 가족은 노동자이면서도 프롤리테리아의 정치적 입장과는 상반되는 입장을 보여 왔다. 국민전선을 지지하는 가족의 선택을 에리봉은 “집합적 정체성을 지켜내려는 서민층의 마지막 호소”로 읽어낸다. 취약한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신뢰를 보내던 사람들이 더 이상 보호를 제공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쪽으로 신뢰를 돌린다. 이러한 움직임은 선거 기간과 투표가 의견을 개인화, 탈정치화한다는 사르트르식 통찰의 한계를 보여준다. 어떤 쪽이든(공산당을 지지하든, 국민전선을 지지하든) 모든 경우에 사람들이 의도한 바는 자신 집단의 목소리가 들리도록 “스스로를 집단으로서 동원하는 집합적 표명이 되게끔 하는 것”(p.152)이었다.

선거 행위는 겉으로는 근본에서부터 개인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집합적 동원 양식이나 타인들과 공동으로 수행하는 행동 양식으로 경험되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개인들의 목소리의 총합이 개별 의지들을 초월하는 ‘일반 의지’의 표현으로 귀착한다고 여겨지는 ‘보편 선거’ 체제의 원리 그 자체를 위반한다.

p.154

뒤이어 에리봉은 생활의 사소한 측면들이 어떻게 세계관과 정치적 사유 체계로 변화하는지를 질문한다. 계급적 반응을 벗어난 인종주의적, 민족주의적 반응은 주로 “민중의 목소리와 민족 감정의 공명”으로 해석되며 이러한 해석은 하나의 “정치적 제안”(p.164)을 구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실 그 민중의 목소리와 민족 감정을 생산해낸 것은 바로 그 ‘정치적 제안’이다. 그러한 반응은 그것을 독려하고 공적 무대에서 의미를 부여하는 조직된 담론의 영향을 받아 확대 재생산된다. 또한 에리봉은 “인종주의적 분할이 계급적 분할을 대신하게 만드는 것은 결집의 부재, 또는 결집/연대하는 사회집단에 속해 있다는 자의식의 광범위한 부재”(p.168)임을 제시한다. 예컨대 좌파가 결집을 파기하자, 집단은 다른 원리인 민족적 원리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5부.

스스로를 게이로 정체화하고 그러한 정체성 속에서 살아온 삶을 회고하며 에리봉은 낙인과 정체성의 관계에 대해 설명한다. 에리봉은 이 관계를 “우리에 앞서 낙인찍힌 정체성이 있다”는 말로 요약하는데, 게이임을 스스로 인식하기 전부터 쌓여 있던 모욕적인 언행의 체계 속에 스스로를 위치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 삶의 어떤 부분을 사적인 것의 영역에 한정시킬 수 있다는] 환상은 그들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 부인당한다. 그러한 경험 속에서 그들은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이 복잡하게 뒤얽혀 있음을, ‘사적인 것’조차 공적 영역의 산물임을, 즉 가장 사적이고 은밀한 정신 현상조차 성적 규범성의 명령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을 매일 절감하게 된다.

p.233

“따라서 모욕은 현실적이든 잠재적이든 세계와 타자에 대한 지평을 구성한다”(p.233). 세계-내-존재는 모욕당한 존재가 되는데, 이처럼 명명에 의해 모욕당하는 과정에서 존재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성적 질서에 복속된 존재로 현현한다. “어떤 것도 순전히 심리적인 것은 없”으며, “규범들은 매일매일의 정신 작용과 주체성을 만드는 것이다”(p.234)

한편 게이 세계와 그 생활 양식은 단순히 섹슈얼리티에만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는 “주체로서 스스로의 사회문화를 창조하는 것”(p.244)과 관련이 있다. 규범(‘정상성’의 시공간)에 편입되지 않은 삶은 공간 사이, 시간성 사이를 오가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규범 밖의 사람들이 타인으로부터의 증오와 모욕을 견디며 살아야 하는 이유는 오직 “사회적 판결의 자의성, 그 부조리”(p.250)밖에 없다.

하지만 모욕과 그로 인한 수치심은 때로 (정치적) 자긍심이 되기도 한다. 이 자긍심을 바탕으로 규범 밖의 사람들은 정상성과 규범성에 도전한다. 이들은 결코 모욕과 수치심에서 해방될 수 없지만, 사회질서가 부과한 바로 그 정체성으로부터 자기 정체성을 주조해 나가기 시작한다.

에필로그

하지만 우리는 왜 상이한 지배 양태에 대항해 이뤄지는 상이한 전투 가운데 어떤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 존재는 복수의 집합적 결정 요인, 복수의 ‘정체성’, 복수의 예속화 양태들이 교차되는 곳 위에 자리잡고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하필 이것 아닌 저것을 정치적 관심의 중심축으로 지정해야 하는 것일까? 물론 모든 운동이 사회세계의 분할과 관련해 그것이 갖는 특수한 원리를 일차적이고 우선적으로 부과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만약 우리를 정치의 주체로 만드는 것이 담론과 이론이라면, 이런저런 측면들을 간과하지 않게 해주는 담론과 이론, 즉 어떠한 억압의 차원도, 어떠한 지배의 층위도, 어떠한 열등성의 할당도, 모욕적 호명과 연계된 어떠한 수치심도 지각과 행동의 장 바깥에 내버려두지 않도록 해주는 담론과 이론을 구축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정치 무대에서 들어본 적 없고 기대도 하지 않았던 목소리와 새로운 문제들을 떠안는, 모든 새로운 운동을 환대할 채비를 갖추게 해주는 이론 말이다.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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