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01.

0. 요나스 메카스의 <Outtakes from the life of a happy man>을 다시 봤다. 수많은 과거 이미지와 요나스 메카스의 모습 속에서, 영화 내내 “기억은 사라지지만 이미지는 남아서 실재한다”는 내래이션이 반복된다. 이미지는 실재한다는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실재한다’는 것은 초월성을 말하는걸까, 아니면 물질성을 말하는 걸까?

1. 전자라면 이미지는 불변하며 절대적이다. 기억은 변하고 사라지지만, 이미지는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항상 존재하며 변하지 않는다. 후자라면 이미지는 물질(필름)에 각인된 또 다른 물질 그 자체이다. 기억은 변하고 사라지지만, 이미지는 하나의 물질이 되어 행위자로서의 성질을 갖는다. 이 때 이미지는 편집되고 열화되어 관람자에게 또 다른 기억을 만들어내는 촉매 역할을 한다.

2. 전자와 후자 중 어느 쪽이 더 타당한 해석인지를 고민해 본다. 전자의 해석에 대해 – 이미지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수용할 수 있을까? 단순히 예전의 필름을 편집하여 영상 구성이 달라졌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메카스의 홈비디오가 어떻게 찍히고 남았을지, 또 재탄생했을지를 생각해본다. 몇 십년 전 가족들은 실제로 잔디밭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강아지는 장난을 치고 있었다. 메카스는 이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실재는 카메라를 통해 기록되고, 실재하는 이미지가 남는다. 몇 십년의 기간 동안 기억은 열화되고, 일부 소멸하거나 변화한다. 몇십 년 후의 메카스는 홈비디오를 다시 본다. 메카스는 홈비디오에서 일부(이 선별 과정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장면들을 추출한다. 이 때 메카스가 본 이미지가 이미지의 생성 당시 메카스가 본 이미지와 동일하다고 할 수 있을까?

2-1. 이러한 질문은 이미지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동반한다. 즉 이미지의 존재 조건이 ‘단순히 그곳에 있음’으로 인해 충족되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보고 수용하는 관람자에 의해 상호적으로 충족되는 것인지 사이의 고민이다. 혹은 ‘고립된 이미지’가 가능할지에 대한 질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태어날 때부터 혼자 살아온 사람이 만든 언어를 ‘고립된 언어’라고 명명한다(‘사적 언어’와는 별개의). “여기서 ‘고립된’은 어떤 사람이 그 구성원으로서 고려될 수 있는 공동체의 결여를 나타낸다.”(이상룡 2012: 312) 비트겐슈타인은 고립된 언어가 가능한지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힌 바가 없지만, 후에 고립된 언어의 가능성을 말하는 입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게 된다. 첫째, 개체주의는 사적 언어의 가능성은 부정하지만 고립된 언어의 가능성은 긍정하면서, “공동체 또는 사회적 환경 없이도 언어적 실천에 종사할 수 있다”(이상룡 2012: 312)고 봤다. 둘째, 공동체주의는 사적 언어만이 아니라 고립된 언어의 가능성도 부정하면서, 공동체 또는 사회적 환경이 없는 언어적 실천은 불가능하다고 봤다.

‘빨강’이 어떤 사물의 형태가 아니라 어떤 색깔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 때에만, 그리고 “이것은 빨간 색이다”가 언제 참이고 언제 거짓인지에 일치할 때에만 ‘빨강’은 사용될 수 있다. 명령의 언어놀이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이러이러한 것을 하라!”는 명령에 “이러이러한 것을 하다”가 그 명령의 수행이라는 데 일치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 <탐구>, 458

고립된 개인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의 경우에도 어떤 것이 놀이인지 아닌지는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다. 최초의 명명에 의해 ‘놀이’ 낱말의 필요충분조건이 마련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의 ‘놀이’ 개념이나 그의 사유 속에서 ‘놀이’의 경계가 정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의 실천에 의해 정해져야 한다. 그는 ‘놀이’란 말이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사용되는 실천에 종사해야 한다. 그의 실천에 의해 그 경계가 가족 유사성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고립된 개인의 경우 그 경계는 오직 고립된 개인 자신에 의해서만 마련될 것이다.

이상룡(2012), p.318

이러한 이유로 고립된 언어는 불가능하다. 무엇이 언어 놀이의 범주에 드는지 아닌지는 선험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자의 실천에 의해 경계지어진다. 하지만 고립된 개인의 실천은 사회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 경계 역시도 사회적이지 않다.

이런 생각을 따랐을 때, 고립된 이미지의 개념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미지는 공동체적 또는 사회적 실천 없이 기능할 수 있을까?

2-2. 2의 앞선 질문이 2-1의 고민을 동반하는 이유는, 고립된 이미지가 가능하다면 이미지는 (그저 그 자리에서 같은 방식으로 재현되므로) 변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지만, 고립된 이미지가 불가능하다면 이미지는 (관람자의 존재에 따라 이미지는 새롭게, 다르게 형성되므로) 변한다고 말해야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지에 있어 공동체적 또는 사회적 실천이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하나는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읽어내는 데 있어 암묵적으로 공유하는 규칙들이다. (시각적 착각을 차치하고서라도) 이미지의 불연속성을 어색하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 등. 다른 하나(로 제시하고 싶은 것)은, 요나스 메카스의 말에 비춘다면 역설적이게도 기억이다. 기억과 경험은 이미지의 성질을 완전히 다르게 느끼도록 하는, 느끼는 걸 떠나 이미지가 완전히 다르게 현현하도록 하는 요소이다. 공유된 기억과 경험은 – 여기서의 공유가 이미지 제작자와 관람자 간의 것이든, 관람자들 간의 것이든 – 이미지의 의미를 창출한다. 공유된 기억과 경험이 없는 채로 전시되는 이미지는 고립된 언어와 마찬가지로 고립된 규칙 속에서 움직이고 고립된 규칙을 따라 의미를 만들어낸다(무의미도 의미라는 이야기는 차치한다).

>>다시 읽어보니 ‘고립된 이미지’가 아니라 ‘사적 이미지’에 대한 이야기인듯?

3. 이런 생각을 따라간다면 고립된 이미지는 존재할 수 없고, 이미지는 다른 행위자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그렇기에 이미지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또한 그렇기에 이미지가 실재한다는 말은 초월성보다는 물질성을 지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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