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27.

-<Moi, Un Noir>(1957, 장 루쉬)를 보고 쓴 메모

<Moi, Un Noir>는 코트디부아르로 온 나이지리아 청년들의 일상을 그려낸다. 감독 장 루쉬는 9개월을 코트디부아르에서 지내면서 청년들을 따라다녔고, 그러면서 우연히 찍힌 장면들을 위주로 영상을 구성했다고 한다. 감독은 모은 영상들을 가편집하고, 그 영상을 극에 등장한 사람들(전문 배우가 아닌)에게 보여줬다. 그리고 그들의 즉흥적인 코멘트를 파리의 스튜디오에서 녹음해 내레이션 및 대화로 영상에 입혔다. 거리의 소음 등은 코트디부아르에서 녹음하여 영상에 삽입했다(영문위키). 특이한 점은, 이 세 축(영상, 대화/내레이션, 앰비언스)이 ‘딱 맞아야 한다’는 일반적인 규범이 이 영화에서는 전혀 지켜지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1. “사진에서는 사실적 존재와 허구적 존재가 서로를 강화한다. … 사실성에 집착하는 사진(보도사진)의 인물일수록 들여다볼수록 온갖 이야기를 감춘 존재처럼 보이고, 기능적으로 허구성에 집착하는 사진(광고사진)의 인물일수록 관람자 앞에 그의 얼굴과 몸에 붙은 사실적 특징들을 무방비로 노출”한다(유운성). 하지만 사진이 지닌 양극성은 영화적 이미지에서는 다르게 나타난다. “영화적 이미지는 인물과 관련해서 허구와 사실의 동시적·모순적 공존을 배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유운성). 그에 따르면 <Moi, Un Noir>의 보이스오버는 “양극성을 억압하는 경향이 있는 영화적 이미지의 구속을 풀어놓는 장치”이다.

1-1. 이 전제에 대해 왜 영화적 이미지는 스틸 이미지와 다르게 양극성을 억압할까, 의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같은 글의 뒤이은 문장에 따르면, 이 전제는 현상에 대한 관찰에서 나온 설명으로 보인다. “우리는 영화를 볼 때 극영화의 경우 허구적으로, 다큐멘터리의 경우 사실적으로 인물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다.”(유운성) 극영화건 다큐건 온전한 ‘픽션’ 또는 온전한 ‘사실’일 수 없다는 점에서 이런 현상은 중요해 보인다. 이건 우리가 습득한 규범의 결과일까, 혹은 영화의 구조가 만들어내는 필연적인 효과와 관련돼 있을까?

전자는 좀 더 사회학적인 설명을 준다. 우리는 극영화의 서사를 ‘온전한 허구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그리고 다큐멘터리의 서사를 ‘온전한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합의를 가지고 있다. 후자는 심리적 효과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 파노프스키는 ‘공간의 역동화’와 그 결과 나타나는 ‘시간의 공간화’ 때문에 영화적 이미지가 특수하다고 봤다. 관객은 렌즈와 동일시되어 “끝없는 운동 상태에 있다”. 스크린 상에 투사된 것을 생생한 경험으로 전달받은 관객은 서사(그것이 약하든 강하든)에 동화되고, 역동적인 영화적 공간은 시간의 개념을 부여받는다. 영화는 불완전한 픽션, 불완전한 사실이지만, 이러한 효과는 영화를 완전한 픽션 또는 완전한 사실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영화 구조의 효과(후자) 위에 영화에 대한 사회적 합의(전자)를 올린다면 전제에 대한 앞선 문제제기가 어느 정도 설명될 것 같다. 영화는 사실 불완전한 픽션, 불완전한 사실이다. 공간의 역동화와 시간의 공간화를 통해 관객은 일부의 사실과 일부의 픽션을 무시할 수 있게 된다. 동시에 관객은 영화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합의를 체화하고 있다. 이 합의에 따라 영화는 극영화와 다큐멘터리(혹은 그 밖의 다른 것들)로 분류되어 각각 완전한 픽션, 완전한 사실로 읽힌다.

2. 장 루쉬는 9개월 간 일종의 인류학적 취재를 한다. 장 루쉬가 ‘본’ 것들(제작자의 눈에 단순히 보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해석틀 상에서 의미가 있는 무언가들)이 카메라에 담긴다. 그리고 그 푸티지들을 편집해 영화의 일차적인 구조를 만들어낸다. 여기까지는 여타의 다큐멘터리와 제작 방식이 다르지 않다. 하지만 가편집본이 주인공 오마루 간다에게 넘어가면서부터는 얘기가 달라지는데, 서사 표현의 언어적 영역이 제작자의 통제를 잠시 넘어선다. 간다는 영상 속 자신의 생활 공간과 자신, 자신의 친구들을 보면서 코멘트를 단다. 오마르 간다가 ‘본’ 것들(마찬가지로 그의 눈에 단순히 보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해석틀 상에서 의미가 있는 무언가들)이 언어로 번역되고 분절된다.

이 과정은 스크린 공간에 수많은 양상들을 집어넣는 역할을 한다.

-영상: 코트디부아르의 풍경, 카메라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는 사람들의 행위, 장 루쉬의 해석.

-음성: (출연자이면서 동시에 전지적 작가가 된) 오마루 간다의 해석, 그 해석을 표현하기 위한 언어적 분절.

3. 코멘트와 함께 가편집본이 다시 장 루쉬에게로 돌아간다. 장 루쉬는 선택과 접합을 한다. 여기에서 루쉬는 영상과 음성을 불일치시키는 편을 선택한다. 배우와 대사는 맞지 않고(입모양만 맞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물의 대사를 줄기차게 오마루 간다가 친다), 앰비언스는 어딘가 붕 떠있다. 음성이 영상과 일치하기를 기대한 관객들은 “사실과 허구 어느 쪽으로 쉽사리 경도되지 않는다”(유운성)

4. 그런데 여기서 영상-음성의 불일치가 겉으로 드러나고 그게 양극성을 해방하는 것은 맞는데, 동시에 영상과 음성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냥 영상-음성의 불일치라고만 말을 한다면, 이 설명은 영상뿐인 영상(무성영화)에 대한 설명력을 잃을지도 모른다. 파노프스키의 또 다른 언급, “시적 감정, 음악적 분출, 혹은 문학적 착상 등이 시각적 움직임과 분명한 접점을 잃게 되면, 민감한 관객에게 충격을 줘서 말 그대로 제자리를 벗어난 것처럼 느껴진다.”는 설명이 여기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양극성을 드러낼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시각적 이미지와 “시적 감정, 음악적 분출, 문학적 착상 등” 사이의 균열, 즉 시각적 이미지와 서사 자체의 균열이다. 서사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 컷 간의 연결 방식, 앰비언스, 대사 속의 감정, 대사가 놓이는 위치 등 – 시각적 이미지와 어긋났을 때 양극성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Moi, Un Noir>가 이 중 선택한 것은 음성(대사와 앰비언스)이고..

4-1. 대사를 극도로 줄이는 영화를 생각해보게 된다(또 차이밍량 기승전차이밍량). 대사를 줄이는 건 어긋남의 가능성을 줄이는걸까? 배우들의 실명을 쓰고, 연속적으로 같은 배우들을 계속 출연시키고, 시각적 이미지에 크게 의존하며, 서사 자체가 매우 약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다큐멘터리라는 인상은 전혀 주지 않는다.

4-2. 동시에 ‘일치를 생각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시각적 정보를 많이 주는 영화를 생각해보게 된다. 자크타티가 종종 보여주는(<Mon Oncle>의 서커스 장면이나 <Playtime>의 레스토랑 장면같이) 가득 찬, 끊임없이 움직이는 이미지들.

5. 언뜻 당연해보이는 생각을 깊게 해본건, 이 논의를 영화 매체가 아닌 다른 곳에도 적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다. 채트먼이 영화의 생략 이미지를 현대 소설에 적용시켜 매체를 넘어섰듯이, 영화 내 양극성 해방에 대한 이 논의를 일반 담화 상황에 적용해볼 순 없을까? 일반 담화 상황이 영화와 유사한 점이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일반 담화 역시도 일종의 ‘연출’의 범주에 들어간다. 담화(이야기를 주고받음)는 청자를 전제하며, 화자는 사실(내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혹은 그 둘의 혼합형태로 경험한 것)을 다양한 방식(눈에 띄게는 언어, 눈에 잘 안띄게 그러나 상시적으로 비언어)으로 표현하여 타자에게 전달한다. 사실과 표현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예를 들어 몸의 아픔을 언어로 전달하는 과정에서는 많은 경우 비유가 필요하다. 고통은 분절되어 온전하지 못한, 축소되고 손상된 형태로 타인에게 전해진다. 이런 간극을 일종의 연출이라고 간주한다면, 사실 우리의 담화 상황은 영화와 마찬가지로 불완전한 픽션 혹은 불완전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일상적으로 우리는 담화를 완전한 픽션(거짓말, 망상 등등) 혹은 완전한 사실이라고 간주하는 듯 보인다.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그 상황의 양극성을 인지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어쩌면 영화와 비슷한 논의를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사회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 – 사회적 합의, 그리고 대화 상황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심리적 효과에 관해서. 그리고 양극성의 공간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지 – 개인의 서사를 구성하는 다양한 양상이 서로 어긋날 때.

5-1. 고프먼이 자아연출을 설명한 방식과 어떤 공통점·차이점이 있는지.

5-2. 민속방법론의 ‘위반 실험’이 이것과 연결될 여지가 있는지.

갑: 잘 있었니?

을: 어떤 의미에서 그 질문을 하는 거니? 나의 건강, 가족, 친구 관계, 금전문제, 학업문제?

갑: 너 어떻게 된 것 아니냐?

김경만, <담론과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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