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05. (2)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을 읽고 쓴 메모 2

3. 네 챕터가 제기한 간극들(비-이성적인 정치적 의지, 역사적 동력의 아이러니함, 이기심의 타자의존성, 미의 파괴로서의 미적 열정)에 대해 몇 가지 생각을 해본다. 하나는 리비가 직접적으로 의도한 여성 작가의 작가성에 관한 것이다.

“여성 작가가 문학적인 고찰 (혹은 숲속) 한가운데로 여성 등장인물을 진입시켰는데 이 인물이 예상치도 못한 주변의 온갖 명암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쳐요. 이 때 작가는 언어를 새로 발굴해 내야만 하는데, 이 언어란 그 스스로 망상이 아닌 주체가 되는 법을 배우는 과정, 그리고 애초 ‘사회 구조’가 그를 직조해 낸 방식의 매듭을 풀어헤치는 과정과 관련된 언어일 수밖에 없어요. … 작가가 되는 법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그에 더해 주체가 되는 법을 터득하기란 무척이나 어렵고 진 빠지는 일이랍니다.”(리비)

“여성 작가는 자기 인생을 지나치게 또렷이 느낄 형편이 못 된다. 그리할 경우 그는 차분히 글을 써야 할 때 분노에 차 글을 쓰게 된다.”(울프, 이 책에 인용돼 있음)

4. 조금 일반적인 차원에서 여성 작가가(혹은 다른 어떤 작가든) ‘사적 경험을 말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 소설이든 에세이이든 혹은 SNS 상의 글이든 일상적인 발화든 말이다. 누군가의 작품에 작가의 과거가 필연적으로 담겨 있다는 관점이 별로라고 느껴질 때도 많지만, 그렇다고 이런 관련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 또한 순진하다는 생각이 든다.

또 다른 책, 멀리사 브로더의 <오늘 너무 슬픔> 역자 후기에서 김지현은 여성 또는 정신질환자가 사적인 경험을 발화하는 것의 가치를 언급한다. 이러한 사적 경험들은 너무나 사적이어서 드러내서는 안될 것으로 여겨지거나 때론 드러난다 하더라도 어떠한 효용을 가져오지 못할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사실 “사적인 경험은 사회적인 것”이며, “그들의 경험은 따로 떼어 놓고 보면 특수한 개인사로 인식되지만, 합쳐 놓고 보면 사회가 여성 일반에게 가하는 조직적인, 지속적인, 광범위한 압력과 착취를 증거한다.”

이러한 설명은 글쓰기에 대한 리비의 관점을 지지해준다. 리비는 자신이(우리 모두가) 사적 경험, 사적 역사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고 여긴다. 또 그래서 자신이(우리 모두가) 아이러니와 타자의존성, 추함을 안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자신이(우리 모두가) 이것을 터뜨려 글을 쓸 수밖에 없다고도 말한다. 리비는 이러한 필연성을 부정하지 않으며, 이 경험들이 사적이지만 사회적이기도 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 하에서 사적 경험은 그 자체로 정치적 의지가 된다.

5. 더 나아가서 누가 정치적 의지를 가질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이 질문 아래에는 정치적 의지가 글을 쓰는 나머지 세 이유의 상위에 있다는 전제가 있다. 오웰은 네 가지 이유를 병렬적으로 나열하고 정치적 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사실 개념적으로 정치적 의지가 상위에 놓여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정치적 목적이라는 말에서 광의의 ‘정치’를 의도한 것이라면, 내심을 표시하고자 하는(‘표시’는 항상 사회적 효과를 기대하고 나타나므로) 동기는 모두 정치적 목적으로 수렴되는 거 아닌가?

아무튼 그래서 리비가 드러낸 간극들을 고려해 본다면, 누가 정치적 의지를 가질 수 있을까? 정치적 의지/목적에 대한 전통적인 논의들을 생각해보게 된다. 여기서의 논의들은 사유하는 주체들을 전제한다. 오웰만 봐도 ‘세상을 밀고 가려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 ‘의견을 내는’ 주체들이 정치적 목적성을 띤다고 말한다. 사회운동론(의지와 운동 사이의 간극을 무시해서도 안되겠지만 러프하게 생각해보자면)의 주체 설정에서는 이런 경향이 더 강하게 드러난다.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지 생각할 수 있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표시하기 위해 주체적으로 프레임을 짜고 뭐 어쩌저쩌..이렇게 정치적 목적성의 소유는 사유능력의 충분조건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리비의 묘사에 따르면 리비에게 있어 정치적 의지는 자신이 알게 된 ‘알고 싶지 않은 모든 것’ 그 자체이다. 어떤 사유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도 ‘알고 싶지 않은 모든 것’은 눈물의 형태로 몸을 비집고 나오며, 또한 글쓰기의 재료가 된다. 그럼 다시, 정치적 목적을 누가 가질 수 있을까? 전통적인 논의들의 암묵적 전제와는 달리, ‘이성을 가졌다’라고 여겨지지 않는 누군가들도 정치적 목적을 가질 수 있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동시에 이 범주를 어디까지 넓혀볼 수 있을지도.

5-1. 그럼 사회’운동’은 어떨지도 추가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의지(목적)을 갖는 것과 ‘운동’을 하는 것은 별개이니까. 리비의 논의를 따른 결론이 맞다 하더라도, ‘운동’을 누가 할 수 있는지는 따로 고민을 해봐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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